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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가족의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다.

by 새싹하나 2025. 6. 12.

 집이 가난하거나 부모님이 현실에 지쳐 힘들어할 때 자식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머리가 좀 크면 반발심리로 그런 부모님이나 가난 탓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와 같이 모든 문제를 본인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잘못이라 말한 적 없지만 내가 요청한 순간, 나로 인해 필요한 것들에 힘겨운 반응을 보이는 부모님을 보고 있노라면 '내 존재가 부담인 건가' 싶어지는 거다. 이런 눈치를 보게 되는 시점에서 생각과 행동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한다. '부모님께 부담되지 않게 잘하자.' 내 탓을 선택한 이유는 명료했다. 내가 힘든 문제의 원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탓이 아니면 부모탓으로 돌릴 정도로 세상이 좁았으니까. 자본주의와 사회 환경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기엔 세상에 가정이 전부였기에 나온 선택이다.

 

 잘한다는 것이 뭘까.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이다. 미숙했던 당시 내게 '잘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어른들이 규정해 둔 사고를 치지 않으며 주변에 거슬리지 않게 얌전한 것이었다. 재미를 모르고 호기심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저 나로 인해 힘든 부모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주변 어른들은 애가 착하고 참하다며 칭찬했고 부모님은 그럴 때 자식을 자랑스럽다며 자랑했다. 사고를 쳐도 힘들게 해도 행복하고 치열하게 지냈다면 순간순간 화내며 미워하다가도 사랑해 줬을 부모님인데 어릴 때는 그걸 몰랐다. 언제든 거둬갈 수 있는 사랑인 줄 알았고 언제든 포기될 수 있는 존재인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부모님과 대화하며 깨닫는다. 내게 가난한 어린 시절은 부모를 보기 힘들 뿐 재미있고 평온한 나날이었다. 부모님께 자식의 어린 시절은 무능력을 실감하고 사줄 수 없어 비참하며 돈을 벌기 위해 고단한 나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지쳐 우울한 부모님을 보고 어렸던 난 '내가 있어서 힘든 걸까'눈치를 봐온 것이다.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부모님은 가끔 논리적이지 못한 요구를 하거나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집이 시끄러우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느라 힘든데 집에서까지 이러면 살기 힘들다고 하거나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반발하려고 하면 어머니는 제발 너까지 날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야 그것이 세대차이에 따른 평균적 상식의 문제임을 알지만 보호자가 필요한 미성년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취급당하기 마련이다.

 

 그런 가정에서 착한 아이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생각을 멈추고 나를 누르고 부모의 하소연을 듣고 부모를 돕는다. 사람이 방황하며 나를 찾아가는 시기가 사춘기라고 했던가. 남들이 사춘기로 본인을 피워낼 때 난 막혀서 고이고 썩어갔다. 교우관계는 좋을 수 없었다. 스스로 망가진 사람은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이뤄갈 수 없다. 특히 사춘기의 관계는 거칠고 막힘없으며 솔직함이 기본인데 난 그것을 해낼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잘 못하는 요소 중 1가지다. 다 때가 있다고 하던가. 때가 있는 것이 맞다. 대학이나 직장, 결혼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으로서 자랄 때, 배울 때, 표현할 때, 나를 돌아볼 때. 같은 연령대에 함께 어우러지며 성장해 나가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그때를 놓친다면 멀리 헤매고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를 찾아가는 지금에 와서 말할 수 있는 건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불행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 행동의 결과이며 선택이다. 그 선택이 불행하다고 자식을 탓한다면 그건 자식의 탓인가 부모의 탓인가. 그 가난에 내가 더 받거나 덜 받는 것도 형제에게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 지원은 부모의 선택으로 이뤄지니까. 내 잘못과 불행은 그 집에 불행과 우울에 빠져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희생이라는 마음으로 가정에 삶을 바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론 온 가족이 다 함께 가정을 일으키자고 힘을 내는 분위기라면 내 삶을 일부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래에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 가난 앞에서 본인의 탄생을 잘못으로 여기거나 날 키워온 부모님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부모의 문제와 본인의 문제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이 있고 부모님은 부모님의 삶이 있다. 내 삶을 부모님이 바꿀 자격이 없듯 부모님의 삶 또한 내가 바꿀 자격이 없다. 각자의 선택은 각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참 이상적인 말이다. 부모님의 말년에 부양해야 하는 기준에서는 실현하기 힘든 생각이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가 없다며 힘들어하는 부모님이나 돈이 없어 힘들다는 형제의 연락을 받는 순간부터 힘들어질 텐데 말이다. 그래도 명확하게 아는 것은 내 가족이 힘들기에 마음이 불편한 거지 내 가족의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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