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울어서 그런 것일까. 오늘 기분은 상대적으로 산뜻하다.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아직 이룬 게 없으니까.
어제 글에 감정을 쏟아붓고 차분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그 글 이후 약간의 변명이다.
나의 부모님은 염치없이 내게 부담만 주지 않았노라.라고.
부모님. 아니 어머니는 늘 최선을 다하셨다. 솔직히 내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
과연 그렇게 지내시는 게 최선이었는지. 본인의 무능력을 체감할 때마다 가족에게 윽박을 질러야 했는지.
나의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하루 24시간 중 18시간을 일하셨다.
태어난 집부터 가난하여 국민학생 때 산세가 나무를 하고 삼밭 일꾼들 참을 만들어주고 집안일, 농사일도 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 생활비를 주기 위해 중3 겨울방학부터 직장을 다니셨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셨기에 고등학교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셨고 고교 등록금은 선생님이 내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을 갈 수는 없으셨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어머니의 막내 동생은 엄마가 20살일 때 11살.
어머니는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하셨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집에 갔을 때 외조부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나신다 한다.
'네가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뭐 된 게 있냐. 바로 공장 갔으면 돈이라도 많이 벌었지.'
어머니는 서울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으면 꼭 본가에 가서 외조모님의 손에 쥐어줬다고 한다.
본인이 지낼 최소한의 생존비를 두고서. 어머니는 1달 먹을 계란 1판과 쌀, 간장으로 간장 계란 비빔밥을 먹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간장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드시지 않는다. 질렸다고 하셨다.
그러다 외조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시며 어머니는 한의원 가까운 곳에 외조모님과 세 들어 살았다 한다.
당시 어머니의 소원은 본인의 아버지 같지 않은 남자를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학이 재미있어 수에 관련된 것을 배우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으니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고 싶었다고.
본인과 다르게 자식들은 풍족까진 아니더라도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다고.
불행이 있다면 어머니는 본인의 아버지와 닮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다.
임신을 해서 수박이 너무 먹고 싶다고 집에서 펑펑 울 때 그 수박을 사 온 것은 어머니의 자매였다.
입덧으로 고생하여 도련님의 밥을 차려줄 수 없노라 말했을 때 임신으로 유세 부리냐 말한 것은 어머니의 남편이었다.
남편의 폭언에 죽겠노라 임신 중 드러누워 몸이 악화되었을 때 챙겨준 이는 어머니의 자매였다.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할 때 돈을 지불한 것도 어머니의 자매였다.
퇴원 후 먹을게 하나도 없을 때 선금을 받아 쌀과 찬거리를 넣어주고 일을 간 것도 어머니의 자매였다.
내가 100일이 되는 날. 친가는 나의 100일을 축하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고 아버지도 집에 없었다고 한다.
연고도 없는 지방에서 이 남자와 못살겠다며 자식 둘 둘러업고 어머니는 외가로 발길을 옮기셨다.
어머니의 친정은 친정이 아니었다. 외조모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돌아가셨고 외조부님도 부양받는 상태였으니까.
자식들과 얹히내며 모든 집안일을 하고 조카들까지 돌봤으나 첫째 오라비가 달려와 혼냈다고 한다.
결혼했으면 어떻게든 잘 살 것이지 자식들과 올라와 피해를 끼친다고.
어머니는 결혼 전 집에 7년 동안 생활비를 줬으나 친정에 1년도 의탁할 수 없었다. 그때 무척 서러웠다 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돈을 벌어서 외가에 찾아오셨다 한다. 어머니는 그냥 아버지를 따라 친정을 떠났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자식들 버리고 새 출발할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는 우리를 놓지 않으셨다.
우리뿐 아니라 남편과 친정 가족들도 놓지 않으셨다. 폭언에 서럽고 노동에 몸이 망가져도 묵묵히 견뎌오셨다.
유년기에 부모님과 함께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출장을 가시면 몇 개월 연락두절에 돈 한 푼 보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환경에서 우리를 키우기 위해 농사를 지으며 투잡을 뛰고 부업까지 하셨었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 머물 손님을 데려와 무상으로 재우고 먹였다. 한분은 아들도 데려왔었다.
아버지의 손님이 없으면 친척들이 와서 무상으로 자고 먹었다. 사촌들도 함께 자랐다.
어머니는 늘 바빴고 내가 본 것은 대부분 뭔가에 집중하는 등이나 잠든 모습이었다.
어릴 때 난 불안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아이답지 않게 어머니만을 바라봤다.
커서 알았다. 그때의 난 어머니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었음을.
어머니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늘 최선을 다하셨다. 다만 내가 외로웠을 뿐이다.
내가 관심이 필요할 때 어머니는 돈을 벌고 계셨다.
어머니의 지지를 필요로 할 때 어머니는 주무셨다.
내가 인간관계로 고민을 할 때 어머니는 '너를 믿는다'라고 하셨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라는 10대 중후반. 나의 삶 제1순위 목표는 '학교에서 사고 쳐서 엄마가 오게 할 일은 없게 하자'였다.
나라는 짐덩이로 허리 하나 제대로 못 펴고 통증으로 비명 지르는 어머니에게 더 부담 줄 수 없으니까.
그것은 하나의 강박이었고 고집이었으며 어린 나의 사랑이었다.
학창 시절 나의 모든 대인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조롱을 당하고 물건을 도둑맞고 혐오 어린 시선도 받아봤다. 선생님은 내가 착하다 했으나 또래는 내가 역겹다고 했다.
삶이 버거운 어머니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웃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으니까.
내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래도 불행하진 않았다. 어머니가 있으니까.
세상에서 끔찍할 정도로 고립되어 자살을 고민할 때도 어머니가 있기에 버텼다.
내 죽음은 어머니의 고생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하루하루 살아냈다.
내가 살아내는 그 시간 어머니도 우리를 키우기 위해 일을 하시며 몸을 망가뜨리며 살아오셨다.
지금 망가진 어머니의 몸은 휴식시간에 달콤한 수면조차 할 수 없는 통증을 동반한다.
어머니는 주무시다가도 통증에 비명을 지르시고 똑바로 누울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짐볼에 기대신다.
그런 몸으로 돈을 벌고 살아오며 누구의 탓도 하지 않으신다. 그저 무능력해지며 돈을 벌 수 없어질 미래가 두렵다 하신다.
우리를 본인 삶의 유일한 복이라고 하신다. 우리를 늘 믿는다고 하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라고.
어머니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내 불안정하고 무능력한 상황에 무력해지는 부모님은 부담이 맞지만 나도 사랑한다.
가난과 무책임함 속 방치당한 성장환경이었으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행복보다 고통과 의무를 더 많이 쥐어주는 가족이지만 그 존재가 나를 이루는 단단한 기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부모님을 늪이라 부르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거다.
이렇게 살다 간 내가 죽을 거 같으니까. 미래는커녕 현재에 숨 막혀하며 괴로우니까.
유년기 나의 고통은 부모님의 책임이 맞지만 지금 나의 고통은 나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나에게 투자하지 않고 가족과의 행복을 꿈꿀 수 없다.
어머니를 1순위로 두고 챙겨본들 그 끝에는 나의 행복이 있을 수 없다. 눈물과 고통은 있겠지.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난 이기적이고 나쁜 불효녀가 되어야 한다. 그리 될 것이다.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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